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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낭만주의의 음악들과 20세기 동향

 

19세기도 후반이 되면 나폴레옹 이후의 시대로 향하는 무대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대부분이 사회에 정착하였다. 전신 기술과 철도가 유럽을 전례 없이 가깝게 만들었다. 19세기 초 낭만파 음악의 중요한 특징이었던 내셔널리즘은 정치적 언어적 수단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중산층 독서가를 겨냥한 문예작품은 출판 활동의 고정과 주요 문학 형식으로서의 소설 진흥으로 이어졌다.

19세기 전반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은퇴하거나 사망하거나 음악활동의 막바지에 이르렀었다.나머지는 정기적인 연주 활동이나 이용하기 쉬운 경제적 기술적 자원을 이용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세기에 걸쳐 악기가 개량되면서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턱받이, 밸브식 금관악기, 피아노 액션의 이중 이스케이프먼트는 신기함에서 표준적인 것으로 자리 잡았다. 음악교육 기회의 극적인 증가는 음악 운동가에게 있어서 자신의 청중 증가를 의미하게 되었다. 음악원이나 음대가 설립된 것도 이 시대다. 자신의 재력을 동원한 흥행 주가 되기보다, 타인에게 가르침으로써 안정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장소가 음악가에게 있어서의 음악원이나 음악대학이었다. 이상의 변화는, 교향곡이나 협주곡·교향시라고 하는 장르의 거대한 물결이나, 파리·런던·이탈리아에서의 오페라 공연의 확대에 자주 볼 수 있다.

독 오 권에서는 리스트나 바그너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후기 독일 낭만주의가 한층 더 진화하여 대규모 악극이나 교향시가 쓰이게 되었다. 바그너가 1850년 이후에 완성시킨 수많은 악극은 화성법과 관현악법 등 음악어법과 예술사상 등 여러 가지 점에서 독 오 권뿐만 아니라 프랑스·이탈리아·동유럽·북유럽 제국 등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또 교향곡에 있어서는

안톤 브루크너
구스타프 말러
둘째, 악극과 교향시에 있어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 가곡에 있어서는

후고 볼프
2개의 흐름은 계승되었다.

후기 낭만파 음악에는 특정 국가에서 민족음악이나 민족시와 결부된 민족양식(국민악파)이 등장해 중요한 작곡가들을 끌어들였다. 음악론에서는 '독일 양식', '이탈리아 양식'과 같은 개념이 장기간에 걸쳐 확립되어 있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진흥을 본 것은 그린카에서 시작되어

무소 구구 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 코후 스키
등에 계승된 러시아 양식(러시아 국민악파)이었다. 비슷한 흐름은 체코의

스메타나
히비 후
드보르자크
야 나체 쿠
노바 쿠
핀란드에서도 볼 수 있으며, 보불전쟁 후의 프랑스에서는

선=상스
이들의 지도 아래 아르스 갈리카(갈리아의 예술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프랑스 작곡가에 의한 기악곡 창작의 진흥)를 표방하는 국민음악협회가 설립되면서 반독일 낭만파 음악을 외친 인상주의 음악 탄생의 토양이 됐다. 대부분의 작곡가는 목적에 있어 민족주의자였고 고국의 언어나 문화와 관련된 오페라와 음악을 창조하려고 했다. 민요에 흥미를 보였던 브람스에게도 민족주의적 경향은 인정된다.

또 이 시기 에디슨 등에 의해 축음기가 실용화되고 음악은 자유롭게 녹음 재생할 수 있게 됐다. 1889년 브람스는 에디슨의 의뢰로 자곡 헝가리 무곡 제1번을 직접 연주하고 녹음했다. 이는 사상 첫 녹음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의 동향과 신낭만주의

19세기에 태어난 작곡가들은 대부분 20세기 들어서도 분명히 전 시대와 연관된 작곡 양식으로 창작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서

자코모 푸치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쿠트 아텔베리
그러나 모더니즘 작곡가들 중에도 초기에 낭만파 음악의 양식을 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3번》, 《8개의 연습곡》작품 42)
아르놀트 쇤베르크 (<정화된 밤>, <그레의 노래>)
베라 버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등의 여러 관현악곡과

가극《청수 염공의 성》
카롤 시마노프스키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연습곡》작품 4)
등의 예가 있다. 그렇다고 19세기 음악의 구조나 표현기법은 단순한 유물도 아니었다.

레이프 본 윌리엄스
에리히 볼프강 코룽골트
는 1950년 이후에도 눈에 띄게 낭만파적인 양식으로 작곡하고 있다.

무조성과 신고전주의 등의 새로운 풍조는 낭만파 음악의 우위에 도전했으나 대작에서는 조성 지향의 반음계적인 음악어법이 나타나고 있다.

구스타브 홀스트
아널드 벅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카를 닐슨
벤저민 브리튼
새뮤얼 바버
말콤 아놀드
이들은 현대 작곡가라는 자각을 갖고 있었지만 작품에서는 종종 낭만파 음악의 요소를 물려받았다.

낭만파 음악은 1960년경 수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구렁텅이에 있었다. 미래는 전위음악과 함께 있는 듯했다. 파울 힌드밋이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양식으로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다른 길로 들어섰다. 보수적인 소련이나 중국의 아카데믹한 서열 속에서만 낭만파 음악이 딱 들어맞는 듯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까지 낭만파 음악의 표현양식이 부활되기 시작했다. 조지 록 버그는 구스타프 말러를 본떠 음렬 기법에서 조성으로 회귀했다. 이런 시도에는 니콜라스 모(영어판), 로버트 헬프스, 데이비드 델 트레디치 같은 동지들이 있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신낭만주의로도 평가되며 존 코릴리아노의 교향곡 제1번 등도 그중 하나로 꼽힌다.

낭만주의 음악 양식이 오래 살고 오히려 번성하기까지 한 분야는 또 있다. 영화음악의 세계이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계 작곡가 상당수는 빈에서 구스타프 말러를 사사했거나 그 영향을 받았다. 막스 스타이너의 화려한 영화음악(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은 바그너 라이트 모티프와 말러의 관현악법을 사용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할리우드 황금시대의 영화음악은

코룬 고루토
스타이너
프란츠 왁스맨
알프레드 뉴먼
휴고 프리드 호퍼
라의 창작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차세대 영화음악 작곡가,

알렉스 노스
존 윌리엄스
엘머 번스타인
이들은 이 전통에 따라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영화음악을 여럿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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